[나노하 팬픽] The Age of Revolution (2) 소녀, 신세를 지다 by ZeX

※ 이 팬픽은 나노하 StS 이후 약 70년이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에리나라고 불린 소녀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직장에 다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비아 맞구나... 정말 오랜만이다."

"정말, 찾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어."

원래대로라면 굉장히 반가워하며 기뻐해야 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빌라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구경꾼들은 몰려있고, 멀리서 경찰도 오고 있고, 어수선하기 그지 없어서─기쁜 마음보다는 황당한 느낌이 더 컸다. 그때 에리나가 실비아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 옷, 관리국 제복이네. 입국해서 여기로 배속된 거야?"

"아, 응. 이번에 집무관 시험에 통과했거든. 오늘 막 부임해온 참이야."

"집무관? 대단하다, 역시 엘리트 아가씨.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에리나는 실비아와 그 뒤편의 빌라를 번갈아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뭐랄까, 적당히 표현할 말이 없네. 오자마자 이런 일 겪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일단 다친 데는 없으니까 괜찮아. 그보단 사정 청취랑 오늘 묵을 곳이 문제인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인명 피해는 없다지만 이것은 엄연한 테러 행위이다. 범죄 행위가 발생하고 피해자가 있는 이상 사정 청취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이렌 소리가 나는 쪽이 아니라 빌라 쪽을 자꾸 쳐다보는 걸 보면, 실비아에게는 사정 청취보다는 당장 지낼 곳이 없어졌다는 문제가 더 큰 것 같았다. 고개를 내젓는 실비아를 보던 에리나가 입을 열었다.

"있지, 그러면 우리 집에서 지낼래? 지금 저녁 때도 가까워져서 새로 방 구하기도 애매할 테니까."

"어?"

의외의 제안에 실비아는 순간 멍해졌다. 물론 3년만에 만나서 반가운 것도 사실이고, 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기쁜 것도 사실이고, 폭발로 빌라 건물 자체가 위험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쳐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실비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사실 집주인 본인이 권하는 것이니 별로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실비아는 그 또래 소녀치고는 은근히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어서 망설이고 있었다.

"괜한 곳에서 신경 쓰는 면은 여전하구나.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뭘 망설여?"

"...그래도 될까?"

"그럼, 물론이지. 아, 경찰 도착했... 아니네."

제복을 입은 한 집단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긴 했는데, 경찰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거칠게 헤치며 다가오는 그들은 관리국원이었다. 관리국 사관 전용 숙소에서 테러가 있었다는 보고를 관리국에서 감청했고, 급히 출동하려던 경찰에 압력을 넣어 관리국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것이다. 본래 미드칠더를 제외한 차원에서 시공관리국의 수사 대상은 차원 범죄자나 불법적인 질량병기, 로스트 로기아 문제 정도로 한정되어 있기에, 지금 이 대응은 명백히 월권행위였다. 애초에 경찰 보고를 감청한 것부터가 위법이었지만, 사실상 관리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에르트에서 관리국의 행동을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실비아만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 국원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맛살을 찌푸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에르트 주민들 사이에는 국원과 엮여서 좋을 것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안녕하십니까, 관리국 테러 대책부 조사과에서 나왔습니다."

"테러 대책부? 그런 부서도 있어요? 아니, 잠깐. 그것보다 왜 경찰이 안 오고 관리국에서 나오는 거죠?"

국원은 실비아의 물음을 무시하고 사정 청취를 시작했다. 미처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진행되는 상황에 실비아는 더 물고 늘어질 기회를 얻지 못했고, 게다가 사정 청취가 끝나자마자 외부인 취급을 받으며 부지 밖으로 밀려났다.

"자, 이제 현장 조사를 해야되니까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은 협조라고 했지만 사실상 강제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밖으로 밀려나고 보니 어느새 현장 보존용 출입제한 결계까지 설치된 다음이라 다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이가 없어진 실비아가 멍하니 있자니, 에리나가 다가와 말했다.

"같은 국원이라고 봐주는 것도 없네. 참 대단하다, 관리국."

에리나의 가시돋힌 말투에 실비아는 고개를 돌렸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가 없구나. 설마, 여기 국원들 다들 이러진 않겠지..."

"글세... 난 국원이 아니라 자세한 건 잘 모르니까. 일단 여기에 더 있을 이유도 없으니 가자. 저녁 안 먹었지?"

실비아는 에리나에게 이끌려 빌라 부지를 뒤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도 할 겸, 저녁도 먹을 겸.




빌라 부지를 벗어난 두 사람은 식당가로 들어섰다. 하지만 실비아는 3년만에 왔으니 아는 가게가 있을리 없고─게다가 당시 초등학생이었고─, 에리나는 '식사의 첫째 조건은 배가 부를 것. 맛이나 모양은 나중.'이라는 식이라서...

"3년만에 만나서 저녁 먹는데 패스트푸드는 너무하잖아..."

둘이서 사이좋게 햄버거를 먹게 되었다. 실비아는 어이가 없어서 작게 항의했지만, 입안 가득 햄버거를 우물거리고 있는 에리나는 안 들린다는 듯이 기세좋게 콜라를 빨아들였다.

"오늘은 요리하기도 귀찮고, 마땅히 알고 있는 괜찮은 가게도 없는걸. 이걸로 참아."

"너 예전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몇년이 지났는데 안 변하면 그게 사람이니, 인형이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하면서 실비아는 햄버거를 베어물었다. 이 상황이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햄버거 자체는 제법 맛있었다. 햄버거와 감자 튀김을 다 먹고 콜라를 쪼로록 하고 빨고 있던 실비아는 에리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정확히는 특정 부위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같은 여자끼리라곤 하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서 실비아는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왜, 왜 그래?"

"우웅~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게다가 왠지 화도 나려고 하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에리나는 실비아의 물음에 아랑곳않고 계속 노려보더니 허리를 펴고 말했다.

"좋아, 아무래도 본인에게 직접 묻는 게 낫겠지. 실비아?"

"어? 왜, 왜?"

갑자기 진지해진 에리나의 태도에 실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똑바로 고치며 말했다. 지금 실비아가 마주한 에리나의 눈빛은 집무관 시험 때 감독으로 들어온 사람 이상의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에리나의 질문을 들은 실비아는...

"가슴 사이즈 대."

하마터면 의자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뭐, 뭐야, 난데없이! 게다가 남세스럽지도 않아?"

실비아는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려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에리나의 말은 지극히 평범한 어조로 나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실비아의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에리나는 그런 실비아의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남세스러운 게 아니야. 지금 이건 중요한 문제라고."

"가ㅅ... 아니, 아무튼 그게 지금 왜 중요한 건데!"

"아무리 봐도 나보다 커 보인단 말이야."

발육이 좋은 친구에 대한 질투입니까, 실비아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얘가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예전엔 조용조용하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이즈가 비슷하면 내꺼 빌려줘도 상관없지만, 나보다 크면 사야된다고. 그걸 알아야 가게로 가든 집으로 가든 하지."

"응?"

"씻고 갈아입을 거 있어야 하잖아. 잠옷이라든가, 속옷이라든가. 하나도 못 건졌잖아?"

그러고보니 그랬다. 일단 지금 입고있는 제복은 멀쩡했지만 사복이나 속옷 같은 건 모두 폭발에 휘말려서 전부 못 입게 되었고, 설령 멀쩡한 게 있다고 해도 빌라에 출입제한 결계가 만들어진 지금은 챙기러 들어갈 수도 없다. 실비아의 표정을 본 에리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넌 여전하구나, 가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게."

"...그런 건 좀 잊어주라."

"그래서, 사이즈는? 말할 거야, 말 거야?"

"말하겠습니다..."




에리나의 집으로 가는 길, 둘은 실비아가 입을 옷이 담겨있는 종이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문명이 무서울 정도로 발전했지만 간단한 의류를 담는 것이 종이가방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 외의 마땅한 대체품을 찾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앞서가던 에리나가 왼손목을 살짝 들여다보고 말했다.

"음~ 8시 좀 넘었구나. 아직 안 왔겠네."

"어? 누가 오기로 했어?"

"그건 아니고, '페이'라고 동거인이 있는데 오늘 좀 늦는댔거든."

"도, 동거인?"

에리나의 대답을 들은 실비아는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가 아니라 동거인이라면, 집에서 나와서 살고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린 실비아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저, 에리나. 너..."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어. 페이는 내 후견인이자 동거인. 그리고 동정은 정중히 사양할게."

이미 비슷한 경험을 몇번 겪었는지, 에리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실비아를 바라보지 않은 채. 그런 에리나의 모습에 실비아는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에리나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에리나는 건물 밖에서 아파트 중간쯤을 쳐다보고 중얼거렸다.

"역시 아직이네. 술은 안 마신다고 했으니까, 뭐 괜찮겠지. 들어가자."

엘리베이터를 탄 두 사람은 7층에서 내렸다. 실비아를 잠시 세워두고 문을 열려던 에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자물쇠가 이미 열려있었던 것이다. 열쇠를 도로 집어넣는 에리나의 모습을 본 실비아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물어보았다.

"왜 그래?"

"문이 열려있어."

에리나의 대답을 들은 실비아의 표정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도둑이라고 생각한 실비아는 짐을 내려놓고 바르디슈가 감겨있는 왼손을 들어올렸지만, 에리나가 그 행동을 제지했다. 실비아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에리나?"

"아, 괜찮아. 페이가 가끔 이러거든. 집에 들어와서는 문도 안 잠그고 불도 안 켜고."

에리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문을 열고 들어섰고, 실비아는 불안했지만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두컴컴한 아파트 안에 음향기기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퍼지고 있었다. 창밖에서 스며들어오는 불빛이 클래식 음악과 조화를 이루어 분위기가 좋았지만, 에리나는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이 환해졌고,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던 검은 머리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아, 진짜. 페이, 제발 문단속 하라고 했죠. 불은 안 켜도 상관 없으니까 문은 좀 잠그고 살자고요. 여자만 둘이 사는 집인데 불안하지도 않아요?"

"상관없잖아. 훔쳐갈만큼 비싼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어차피 너한테 걸리면 끝이고."

"혼자 있을 땐 어쩔 건데요."

"그건 그 때 일."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사장인지, 에리나는 지난 3년간 전혀 풀지 못한 의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런 에리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이라고 불린 중년 여성은 고개를 돌려 에리나의 등 뒤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실비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에리나를 낚아채고는 실비아에게 등을 돌렸다.

"왜, 왜 그래요?"

"쟤 누구야, 국원 같은데 왜 데려온 거야?"

"아, 질투에요? 나잇살 먹고 그러면 보기 흉해요."

"시끄러웟!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우리 집에 국원을 데려오면 어쩌잔 거야!"

"어차피 집에는 문제될 것도 없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눌러살 것 아니니까 걱정말아요. 그보다, 오늘 거래처 사람이랑 저녁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가게 앞에 도착했는데 연락 오더라. 급한 사정이 생겨서 못 나가게 됐다며 미안하다고. 그래서 혼자 먹고 바로 들어왔지."

"거기서요? 혼자서?"

"응."

"그런 데서 혼자 먹고 싶어요?"

"예약한 게 아깝잖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페이의 품에서 빠져나온 에리나는 멀뚱히 서 있는 실비아에게 다가가 어깨를 탁탁 두드리고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자, 페이. 이쪽은 내 초등학교 친구, 실비아 디사이플이에요. 보시다시피 국원. 신임 집무관으로 오늘 도착했어요. 그리고 실비아, 이쪽은 아까 말했던 내 후견인 겸 동거인 '페이 왕'. 디바이스 업계 중소기업 사장이고 미혼. 나이는..."

"말하지 마!"

나이 부분에서 신경질적으로 소리지르는 페이를 흘끗 쳐다보고 에리나는 말을 이었다. 그 순간 실비아는 에리나의 얼굴에서 으스스한 기운을 본 것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씨익' 하는 느낌이랄까.

"뭐, 본인이 말하지 말라니까 넘어갈게. 확실한 건 우리 나이의 두배는 가뿐히 넘어."

"에리나아아아아!!"

"소리지르지 말아요. 옆집 사람들에게 민폐에요. 그리고 인상쓰지 말아요. 주름살 늘어요."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짚는 페이의 모습을 보며, 실비아는 다시 한번 '얘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반쯤 한탄조로. 잠시 그러고 있자니 페이가 고개를 들고 다가왔다. 얼굴이 미인은 아니었지만 호감가는 인상이었다.

"그래, 에리나의 친구라고? 잘 부탁해요. 에리나한테 친구면 나한테도 남은 아니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실비아 테스타로사 디사이플이에요. 그리고 존대는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에리나 대하듯 하세요."

깍듯이 인사하는 실비아의 모습에 페이는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예의가 바르네. 본인이 그러라고 하니 말은 놓을게. 그나저나 친구 사이인데 어쩜 이렇게 상냥할까, 에리나도 예전엔 착하고 귀여웠는데 요즘은 너무 차가워."

자신을 돌아보며 하는 페이의 말을 듣고 에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에리나의 불평을 듣는 둥 마는 둥, 페이는 부엌으로 가더니 찬장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종류는 알 수 없지만 술병과 잔 세개였다.

"자, 그건 그렇고. 에리나의 친구가 왔으니 환영회를 안 할 수 없겠지? 마시자!"

페이의 태도에 에리나는 기가 막혔다. 방금 전까지 국원을 집에 데려왔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윽박지를 땐 언제고, 지금은 또 환영회하자며 술을 꺼내고 있으니 황당했다. 하지만 평소 페이의 사고방식을 생각해보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래, 이 사람 원래 이런 식이었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제 전환과 분위기 전환이 빠른 능구렁이. 정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지금 지위까지 올라온 거야? 아니, 오히려 이런 사람이니 가능했던 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에리나는 반사적으로 안주거리를 찾아 꺼내고 있었고, 페이는 테이블에 앉아 벌써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되고 있는 실비아만 오도카니 서 있을 뿐이었다.




『Sir, 일어나십시오.』

"우웅..."

『출근하실 시간입니다. 일어나십시오.』

"바르디슈... 조금만 더..."

『더 주무시면 지각합니다. 출근 첫날부터 좋지 않은 인상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휴... 알았어... 일어날게..."

바르디슈의 재촉에 실비아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킨 채 잠시 침대에 앉아있던 실비아는 낯선 방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어젯밤 일을 기억해냈다.

"맞다. 에리나네 집이지, 여기..."

어젯밤의 반강제 환영회는 거의 부어라 마셔라 상황이었다. 페이의 독촉에 실비아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고, 에리나의 제지가 아니었으면 아마 완전히 넉다운 되어서 일어나자마자 숙취 때문에 고생했을 것이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렇게 환영회를 마시고 죽자 분위기로 끌고 가던 페이가 가장 먼저 다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에리나는 페이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만 주량은 적고, 그러면서 숙취는 전혀 안 겪는 희한한 체질'이라고 했다. 그리고 에리나가 페이를 침실로 데려가고, 실비아 자신은 에리나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실비아는 에리나의 잠자리에 생각이 미쳤다. 피곤했던 데다 술기운 때문에 미처 에리나가 잘 곳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문 밖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실비아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고, 부엌에서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하고 있는 에리나의 모습을 보았다. 실비아가 방에서 나오자 그 인기척에 에리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응, 다행히 숙취는 없어. 그런데 어젯밤에는 어디서 잤어?"

"페이 옆에 요 하나 새로 깔고 잤어. 아무래도 내 침대는 둘이서 자기엔 좁으니까."

"요?"

"아, 실비아는 잘 모르겠구나. 침구류의 하나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눕는 건데, 일종의 매트리스? 용도는 매트리스지만, 생긴 건 이불을 몇배 두껍게 만든 거에 가까워. 나도 페이랑 같이 살기 전엔 몰랐지만."

"그랬구나..."

벽에 기댄 채 얘기를 주고 받는 실비아의 모습을 본 에리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좀 씻고 나와. 속도 그리 나빠보이지 않으니까 스프랑 토스트, 달걀 프라이 정도면 괜찮겠지?"

"아니, 그냥 지금 먹을게. 머리 말리다보면 시간 오래 걸리니까 먼저 먹는 게 나아."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서 줄게."

실비아는 의자에 앉아 달걀을 깨는 에리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3년만이지만 정말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지나칠 정도로 밝고 활달해진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에리나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달걀 프라이 세개를 테이블에 내려놓던 에리나는 그 미소를 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페이는 안 깨워?"

"어차피 이 시간 되면 알아서 일어나. 신경 안 써도 돼."

에리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부스스한 모습의 페이가 걸어나왔다. 막 일어나서인지 눈은 반쯤 감기고 머리가 산발이긴 했지만 쓰러지도록 술을 마신 후유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에리나, 배고파."

'글세 이렇다니까'하고 중얼거린 에리나는 음식들이 놓인 빈 자리를 가리켰고, 흐느적거리며 다가온 페이가 자리에 앉으면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스프야? 술 마신 다음날은 국이 좋다니까."

"잔말말고 주는대로 먹어요. 아니면 직접 끓여 먹든가. 나 온 뒤로 요리는 한번도 안 했으면서."

"실비아~ 에리나 애정이 식었어~."

"어제 처음 만난 사람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그리고 먹기 싫으면 내놔요!"

조금 떠들썩한 아침식사였다. 실비아는 미소를 지으며 스프를 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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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구상할 때 페이는 원래 빠릿빠릿한 캐릭터가 될 예정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밖에선 빠릿하지만 집에선 늘어지는 타입이 되었군요. 아니, 그보다는 상황에 맞춰 변하는 카멜레온인가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드래곤 케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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