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하 팬픽] The Age of Revolution (4) 소녀, 일이 꼬이다 by ZeX

※ 이 팬픽은 나노하 StS 이후 약 70년이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에리나의 집에서 새로 구한 집으로 짐을 옮긴 후, 실비아는 업무를 확인하고 그간 쌓여있던 집무관 결재 서류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긴급 결재를 요하는 것들은 없었지만 일단 한달 가까이 밀려있던 것들이라 양 자체가 많았기에, 2주일에 걸쳐 결재를 마친 실비아는 그 후로 한동안 결재 서류만 봐도 몸서리를 쳤다. 에리나와도 가끔 만나 일이 많다고 한탄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에리나의 고충도 들어야 했기에 결과적으로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9월이 되었다.
실비아가 최근에 입수한 로스트 로기아 밀수에 대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필리아가 말을 걸었다.

"집무관님, 테러 대책부에서 또 협조 공문이 왔는데요."

"또요? 하아, 이제 좀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테러 대책부의 요청이라는 말에 실비아는 푸념을 했다. 말이 '요청'이지, 실제로는 작전에 합류하라고 '통보'하는 것과 같았다. 사실 에르트 본부에선 이상할 정도로 대 ELF 작전의 우선도가 높았다. 1급의 우선도가 아닌 한, 대 ELF 작전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당 작전들의 완수도가 높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 실제 실행까지 가는 것은 입안된 것의 20%, 그 중에서 성공하는 비율은 절반도 채 안 되는 실정이었다. 당연히 대 ELF 작전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테러 대책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많았다. 그리고 실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저번에 협조 요청 때문에 놓친 무리들 단서 겨우 잡았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또 놓치게 생겼네요. 아아~, 짜증나~."

부임하고 한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실비아가 밀린 서류 결재만 한 것은 아니었고, 결재를 모두 끝낸 다음에는 전임자가 조사중이던 범죄자들에 대한 수사도 진행했다. 하지만 조금 진척이 있을만 하면 테러 대책부에서 협조 요구가 오는 바람에 매번 시기를 놓쳐 단서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테러 대책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필리아는 투덜거리는 실비아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기, 그렇게 짜증은 안 내셔도 될 것 같은데요? 우리 수사 대상과 연관이 있어요."

"네? 그래요?"

실비아는 필리아가 보낸 공문과 자료를 열어보고 현재 테러 대책부에서 조사하고 있는 대상이 자신들이 쫓는 밀수범들에게서 로스트 로기아를 입수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첨부된 자료에 의하면 테러 대책부에서 쫓고 있는 자들은 지난 5월 우주공항 테러의 범인들로, 이번에는 로스트 로기아를 동력원으로 이용한 질량 병기를 써서 테러를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나 참, 질량 병기 만드는 걸 숨기는 것만도 큰일일 텐데 로스트 로기아 밀거래까지? 간이 크다고 해야할지, 대담하다고 해야할지..."

실비아는 자료를 읽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뱉자, 필리아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잖아요. 조금만 무리하면 더 좋은 걸 구할 수 있는데 굳이 다른 걸 쓸 필요없다, 뭐 그런 생각이었겠죠. 덕분에 우린 좀 편해졌지만요."

질량 병기는 마도 병기가 아닌데도 그 동력원으로 로스트 로기아가 선호되는 이유는, 거기에 담긴 순도높은 마력에 의해 장시간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소형 기동병기에 탑재가 가능한 배터리는 길어야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엔진의 경우에는 연료 문제도 있거니와 연료 탱크까지 붙기 때문에 일정크기 이하로 소형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반면 로스트 로기아는 지속적으로 마력을 방출하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활동이 가능하고, 크기도 작은 것은 아기 주먹만 하다. 물론 무장은 로스트 로기아의 마력을 활용하기 위해 레이저 병기가 주류가 되지만, 일부 제작자들의 경우 굳이 실탄 및 근접 무장을 장착하는 경우도 있고, 극단적인 자들은 아예 근접 무장으로만 도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질량 병기를 쓰는 범죄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로스트 로기아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건 그렇고, 협조 내용은 또 뭘까... 자꾸 붙잡는 통에 제대로 조사한 것도 없는데..."

심드렁한 말투로 공문을 읽어가던 실비아는 자신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스크린을 조작하던 손은 자기도 모르게 있는힘껏 주먹을 쥐고 있었다. 협조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안돼. 참자, 참아. 폭발하면 안돼. 참아라...'

실비아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생각을 멈췄다. 가라앉히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간 자꾸 공문 내용이 떠올라서 혈압이 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왠만큼 진정됐다고 생각한 실비아는 눈을 떴고, 또 그 공문의 내용을 보고 말았다.

"...도대체 지들이 뭔데에에에에!!"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실비아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지르자 필리아는 잠깐 몸을 움츠리고는 조용히 일어나서 사무실을 나갔고, 실비아는 혼자 남은 방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내가 계급이 낮기로써니 이건 너무하잖아! 명색이 집무관인데 타 부서 작전에 끌려다녀야 해?! 그것도 곁다리로?!"

그랬다. 테러 대책부에서는 밀수범과 테러리스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고, 이미 작전 시행 일자와 시간, 인원등의 세부사항까지 모두 결정된 다음에 실비아에게 참가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테러 대책부에서 말하는 '요청'은 사실상의 '통보'다. '그렇게 됐으니 잔말 말고 우리 말대로 해라'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동안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이던 실비아는 얼마 후 진정이 되었는지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일단 자신이 쫓던 자들도 연루되어 있으니 작전 참가를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그리고 자기 기분 때문에 작전을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실비아는 화를 억누르며 작전 참가에 동의하는 답신을 보냈다. 메시지 송신이 끝나자 실비아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여기 왜 이럴까... 난생 처음 보는 부서가 있지를 않나, 모든 게 그 부서 우선이질 않나... 게다가 완전히 안하무인이고..."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관리국은 차원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게 목적일 텐데, 에르트에서 관리국의 행동은 '질서 유지'가 아닌 '지배'에 가까워 보였다.

'지배...? 그러고보니 여기 직할 세계였지. ...어머?'

지금껏 실비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관리국의 직할 세계는 에르트가 유일했다. 다시 말해 최초의 직할 세계이며 현재까지 추가로 직할 지정이 된 차원계나 행성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좀 든 국원이라면 알고 있었을 테지만, 태어났을 때 이미 에르트가 관리국 직할이었던 실비아로서는 그 상황이 당연하게 생각되었기에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해보지 않았다.

'전 차원계를 통틀어 유일한 직할 세계...? 어째서일까? 처음에 직할 지정은 왜였지? 왜 추가로 직할 지정이 된 곳은 없지? 왜 아직까지 해제가 안 된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신이 에르트와 관리국의 관계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실비아는 다른 일을 제쳐놓고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어느 새 돌아온 필리아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닷새 뒤?]

[그래, 11일 새벽 2시에 시외 폐공단에서 거래를 한다던데.]

[역시 전부 다 나오지는 않겠지?]

[한번에 일망타진 당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꼭 그 현장을 덮칠 필요는 없잖아? 우리 목표는 '녀석들'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밀수범들을 그냥 두기도 좀 그래서 말이야.]

[이봐, 이봐.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발전용으로 쓰는 로스트 로기아는 어떻고.]

[그것도 그렇군. 알았어, 거래가 끝난 다음 '녀석들'의 뒤를 밟으면 되지?]

[아, 참.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어. 관리국에서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뭐? 그럼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관리국 놈들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녀석들' 중 한두명 정도가 도망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설마 그걸 방해해서라도 '녀석들'을 잡으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만약 빠져나가는 놈들이 생기면 그 뒤를 쫓으라는 거다. 일부러 방해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알았어, 그렇게 하지. 하지만 만약 '녀석들'이 전부 체포당해도 우린 몰라.]

[하하. 그래, 알았다. 그리고 일 끝나면 연락하는 거 잊지 마라, 이반.]

[OK. 염화 종료.]

[염화 종료.]




'결국 이렇게 됐네...'

신력 145년 9월 11일, 새벽 1시 40분경. 실비아는 테러 대책부가 주도하는 테러리스트 체포 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장소는 에르트 시 외곽에 있는 폐공단 지역. 본래 이곳은 우주 전함에 장착하는 대형 병기들, 그 중에서도 레이저나 빔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하지만 에르트가 시공관리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직할 세계가 되면서 관리국에서는 에르트를 무장해제 시켰고, 새로운 전함이나 전투병기의 취역을 불허함은 물론 기존의 병기들을 폐기시키고 타 차원계에 대한 판매까지 금지시켰다. 자연히 관련 업체들은 이미 완성 단계에 들어가 있던 물품들에 대한 대금을 받지 못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리다 결국 줄줄이 도산했고, 사업주들은 공장에 있던 설비들을 내다 팔아 빚만 간신히 갚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신력 125년 경의 일이었다.
그 후로 약 20년이 지나는 동안 마땅히 들어설 업체들도 없었고, 관리국으로서는 딱히 재개발할 필요성도 없었기에 폐공단 지역은 사실상 버려져, 가끔 폭주족들이 모여 집회를 여는 식으로 쓰이고 있었다.

'기분 나빠...'

실비아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뜩 녹이 슨 채 반쯤 열린 철문들, 성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리창, 잔뜩 우그러들고 찢어진 셔터, 곳곳에 굴러다니는 비닐 봉지와 타다 남은 재, 까맣게 그을리고 구멍 뚫린 드럼통 같은 것들이 음침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부스럭-

'흡!'

등뒤에서 들린 소리에 실비아는 기겁하며 몸을 돌렸다. 너무 급하게 몸을 돌리는 바람에 잠깐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정작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바람에 날려 굴러가는 비닐 봉지가 보일 뿐이었다.

'하, 하아...'

아무래도 잠복 중이라 느껴지는 긴장감에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겹치면서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안도와 부끄러움이 반씩 섞인 한숨을 내쉬며 실비아는 조용히 다시 자세를 잡았다. 옆에서 대기중인 무장국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썼다간 무안함이 몇배가 될 것 같아 억지로 무시했다. 다행히 실비아가 계속 앞만 보고 있자 국원들도 눈길을 돌렸고, 실비아는 다시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속으로만.

'그건 그렇고, 안 나타나네...'

45분이 넘어가고 있건만 테러리스트도, 밀수범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혹시 정보가 샌 걸까 하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기다려볼 수밖에 없기에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실비아는 어느새 에르트 본부에 대한 의문점을 되짚고 있었다.

'다른 행성에 있는 건 전부 지국이나 연락사무소인데 왜 에르트에만 본부급 시설이 세워진 걸까. 아니, 애초에 직할 세계로 지정된 경우가 전무후무하던데, 왜 굳이 직할 세계로 지정한 걸까. 차원간에 있어 지정학적 중요성 같은 게 존재할 리도 없는데. 게다가 본국이나 지상본부에조차 없는 테러 대책부라는 부서까지 있고...'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자신과 함께 작전에 참가하고 있는 국원들을 살펴보았다. 잠복중이라 디바이스는 대기 상태로 둔 채 배리어 재킷만 착용중인 그들은 전원이 무장대 공식 배리어 재킷을 착용하고 있었다. 현재 작전 수행중인 인원은 자신과 무장국원 1개 소대 24명, 그리고 지휘 및 연락을 위해 테러 대책부에서 나온 5명까지 모두 30명이었지만 테러 대책부원들은 전부 지휘차량에 있었다. 어쩐지 내몰리는 느낌까지 들었다.

'하는 건 단순한 테러 방지와 대응 수준을 넘었잖아. 이건 무슨 외교관 면책 특권도 아니고, 왜 이렇게까지 테러 대책부의 지위가 상위에 위치해있는 거지? 그러면서 현장에 직접 나서지 않는다니, 이건 대체 무슨 생각일까.'

지금 작전에서도 지휘권을 가진 테러 대책부의 국원은 방탄 및 결계 처리가 되어 있는 지휘차량에서 대기 중이었다. 게다가 사소한 것 하나도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못을 박았기에 황당했다.

'설마 상대를 제압하는 것까지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실비아가 어이없는 자신의 상상에 피식 웃는데 염화가 들려왔다. 개인간이 아닌, 지휘차 설비를 이용한 다수 대 다수의 염화였다.

[목표 집단 탐지, 승용차와 밴 1대씩입니다. 현재 폐공단 진입, 3분 후 현장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다른 목표 탐지. 역시 승용차와 밴 1대씩으로, 현장 도착까지 약 4분으로 예상됩니다.]

[좋아, 놈들이 도착하고 물건을 교환할 때 시작하겠다. 모두 준비하도록. 혹시 모르니 결계도 강화하라.]

테러 대책부의 오퍼레이터들의 염화에 이어 지휘를 맡은 릴스 플리핀트(Reels Flippint) 대위의 염화가 들려왔다. 지시를 들은 결계 유지를 맡고 있던 국원이 한층 더 정신을 집중했고, 다른 국원들은 대기 상태의 디바이스를 언제든 셋업 할 수 있도록 각자 손에 쥐었다. 실비아도 바르디슈를 준비하며 결계 너머를 주시했고, 잠시 후 검은색의 중형 승용차와 대형 밴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들어와 마주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실비아는 '어쩐지 범죄 영화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정면에서 쏘는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양쪽 다 헤드라이트를 아래쪽으로 향하게 해서 빛의 노출 범위를 줄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금 늦게 들어온 자동차가 멈추자, 양쪽의 차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숫자는 실비아 일행과 비슷해 보였고, 그중 한명씩은 서류가방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가방을 든 사람 옆에 서 있던 사람이 건너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암호인 모양이었다.

"물질과 마법."

"우위는 없다."

"추구하는 건."

"오직 힘 뿐."

"좋아, 물건은 가져왔나?"

"물론,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 않나."

"그도 그렇군. 그러면 빨리 끝내고 헤어지지."

말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든 남자들이 앞으로 걸어나왔다.실비아 일행은 그 모습을 본 것은 물론 그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결계가 그들의 기척과 마력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집단 사이의 거리가 채 1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방을 든 남자들은 양편의 중간 지점에서 마주쳤고, 각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가방을 모두 열어 내용물을 서로에게 확인시켰다. 한쪽의 가방은 모두 지폐, 다른 한쪽의 가방은 결정체 형태의 로스트 로기아였다. 로스트 로기아는 가방 자체에 마력 차단 효과가 있었는지, 가방이 열리자 상당한 수준의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확인 절차까지 끝낸 둘은 가방을 닫고 상대방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정확히는 가방 손잡이를 잡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작전 개시!]

릴스의 염화를 들은 국원이 결계를 해제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무장국원들이 디바이스를 셋업시키며 숨어있던 장소에서 뛰쳐나왔다. 전투 태세를 갖춘 관리국원들에게 둘러싸인 범인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포위가 끝나자 릴스는 범인들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지휘차량에는 음성 증폭 설비가 있기 때문에 염화 설비와 조합하면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시공관리국 에르트 본부 테러 대책부에서 나왔다. 당신들을 로스트 로기아 밀수 및 밀거래, 질량병기 불법 제조 혐의로 체포한다. 순순히 투항하는 편이 서로에게 이로울 것이다.]"

릴스의 투항 권고를 들으며 범인들을 살펴보던 실비아는, 그 중 한명이 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리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우두머리인 듯 했다.

"하, 관리국 나리들이신가. 대범하신 분들께서 쥐새끼처럼 숨어 계시느라 노고가 많으셨겠어?"

주눅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비꼬는 테러리스트 우두머리의 태도에 실비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숫자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저쪽은 전투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에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지는 명백한데도, 저 자는 너무나 당당했다. 아무래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다시 한번 말한다. 저항은 소용없으니 투항하라. 그 편이 서로에게...]"

릴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도중에 우두머리가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로스트 로기아 가방을 들고 있던 남자가 그 가방을 자신의 무리 쪽으로 집어던진 것이다. 국원 몇명이 다급하게 비살상 설정의 사격 마법을 써서 그 남자를 맞췄지만 가방은 이미 던져져 테러리스트 일당의 손에 들어간 후였고, 범인들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원 체포하라!]"

성난 목소리로 릴스가 소리치자 국원들은 각자 디바이스를 범인들에게 겨누고 비살상 설정의 마법을 발사했다. 하지만 그 마법들 중 명중된 것은 밀수범들 쪽으로 날아간 절반뿐이었다. 테러리스트들 쪽으로 날아간 마법이 갑자기 발동된 실드 마법에 막힌 것이다. 비살상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다수의 사격 마법을, 그것도 디바이스도 스탠바이 모드인 상태에서 막아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국원들 모두가 굳어있는 가운데, 테러리스트 우두머리가 자신의 옆에서 실드 마법을 사용한 마도사를 바라보며 웃었다.

"과연, 로스트 로기아의 마력은 대단하군."

마도사의 왼손에는 어느 샌가 가방에서 꺼낸 로스트 로기아가 쥐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로스트 로기아의 마력을 제어하려면 복잡한 술식이 필요한데!"

"궁금하신가, 국원 나리?"

실비아의 외침에 우두머리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돌렸다. 방금 거래를 마친 밀수범들은 전원이 쓰러졌는데도 여유 넘치는 태도였다. 아마도 자신들은 무사히 빠져나가리라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이 친구는 다른 건 몰라도 술식 구축에 있어서는 최고거든. 마력 랭크는 C랭크이지만, 마도 이론에 있어서만큼은 S랭크에 육박하지. 아니, 어쩌면 SS랭크 쯤 될지도 모르겠는데?"

"거짓말하지 마라! 자신이 쓸 수도 없는 마도 이론을 이해하고 제어한다는 게 가능할 리 없어!"

반쯤 패닉에 빠진 한 국원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국원은 우두머리의 대답에 말을 잃었다.

"왜지? 그렇게 따지면 마도랭크 EX의 아르크 앙 시엘은 애초에 만들 수 없는 것 아닌가? AA랭커도 못 되는 디바이스 마이스터들이 S랭커의 디바이스를 만드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국원은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아르크 앙 시엘의 위력은 SSS랭크 마도사가 수천이 모여야 재현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니 아까 국원이 한 말대로라면 처음부터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물건이지만,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입술을 깨무는 국원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실비아는 조금씩 테러리스트 무리로 접근했다. 지금 이곳에 자신이 있는 이유는 범죄자 체포를 위해서이지 말싸움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거기 국원 아가씨. 움직이지 말도록. 포격이 날아갈 거야."

우두머리의 말에 테러리스트 측의 마도사들이 디바이스와 배리어 재킷을 전개했다. 숫자는 전부 8명, 디바이스는 지팡이 형태의 전형적인 스토리지 디바이스였다. 숫자는 자신들이 우세했지만 저쪽은 로스트 로기아의 마력을 활용하는 사람이 있기에 실비아는 우위를 자신할 수 없었다. 지금 관리국 측 인원 중 가장 랭크가 높은 것은 AAA랭크의 실비아 자신 뿐이었기 때문이다. 실비아가 자신을 향해 겨눠진 적의 디바이스를 노려보고 있는데 릴스의 염화 통신이 들려왔다.

[뭘 망설이나, 숫자로 밀어붙여서라도 잡아! 이건 명령이다!]

'대체 이 작자 머릿속에는 뭐가 들은 거야'

실비아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지시를 따랐다. 어차피 잡긴 잡아야 하는 상대였다.

"공격!"

실비아의 외침과 함께 무장국원 절반이 재차 사격 마법을 쏘았지만, 역시 그 대부분이 실드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머지 절반과 실비아가 접근전을 위해 돌격해 들어갔고, 적 마도사들이 방어 태세를 취하는 사이 우두머리는 나머지 무리들과 함께 승용차에 올라탔다. 현장은 곧 폭음과 섬광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이군. 저기 지휘자가 누군지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정말 난리도 아니네요.]

[폐공단 지역이길 천만다행이야. 도심이었으면 시민 피해가 어마어마해졌을 테니까.]

[기왕이면 저러다 양쪽이 다 자멸해주면 좋을 텐데...]

[지금 저 광경을 보고도 그런 감상이 나오냐, 너희들은?]

전투 현장에서 약 100m 떨어진 창고 안. 배리어 재킷을 입고 디바이스를 손에 쥔 또다른 무리가 결계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디바이스의 형태도, 배리어 재킷의 디자인도 모두 제각각인 것으로 보아 공식적인 집단의 소속은 아닌 듯 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7명이라는 인원 중 10대 중반 정도의 소녀가 한명 끼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칠흑의 배리어 재킷을 착용하고 있는 소녀는 황금빛 창머리에 붉은 구슬이 박힌 디바이스를 쥐고 있었다.

[오호, 놈들이 빠져나온 모양이군.]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말에 그들은 잡담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보고 있는 스크린에 푸른 색의 배리어에 감싸인 채 현장을 빠져나오는 검은색 승용차가 비치고 있었다. 속도를 올리는 자동차를 보며 남자가 염화를 계속 이었다.

[장, 이동한다. 준비해.]

[라저.]

장이라는 남자는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마력과 기척을 차단하는 결계는 필요에 따라 이동하면서도 사용할 수 있지만, 대신 언제 무효화될지 모르기 때문에 한층 더 정신을 집중해야하고 그에 따라 쉬이 피곤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케인, 장을 안아라.]

[네입. ...하아, 이런 일만 아니라면 사내놈을 안아드는 건 정말 때려죽인데도 안 할 텐데.]

케인의 염화를 들은 장이 '시꺼, 나라고 좋아서 안기는 줄 아냐'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케인은 그런 장을 무시하며 번쩍 안아올렸다. 남자가 남자를 공주님 안기로 들고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한 감상을 품게 했다.

[고개 돌려라.]

케인의 으르렁 대는 듯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대장격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대로 출...]

대장의 염화는 거기서 끊겼다. 소녀가 갑자기 대장의 앞으로 튀어나오며 실드를 전개한 것이다. 그 직후 창고 벽을 뚫고 들어온 포격 마법이 실드에 충돌했다. 결계가 마법이 아닌 마력의 기운을 차단하는 용도여서 방어 효과는 제로(0)인 만큼, 만약 소녀가 막지 않았다면 모두 포격에 휩쓸렸을 것이다.

"...젠장, 모두 이탈! 오늘 작전은 실패다!"

대장의 말에 일행은 재빨리 PA(Powered Armor)를 기동, 배리어 재킷을 해제하며 갑옷으로 온몸을 감쌌다. 얼굴까지 빈틈없이 감싸이자 일행은 무너지려 하는 창고에서 뛰쳐나왔다.




"저건 또 뭐야?"

한창 전투중이던 실비아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당황했다. 어느 국원의 포격을 적 마도사 한명이 피하면서 조금 떨어진 창고를 꿰뚫었는데, 그 직후 창고에서 디바이스를 쥔 무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순간 테러리스트의 동료인가 싶었지만 적 마도사들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정체가 뭘까 싶어 그들을 살펴보던 실비아는 그 중 한명의 모습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이 착용한 밝은 푸른 색의 PA와 확연히 구분되는 칠흑의 PA, 황금빛 창머리를 가지고 붉은 구슬이 박혀있는 디바이스.

"검은 마녀(Black Witch)!"

실비아가 깨닫는 것과 동시에, 아까 포격을 날렸던 국원이 외쳤다. 그 외침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며 현장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은 릴스의 지시로 깨어졌다.

[우선 순위 변경! 마녀 체포를 우선시하라!]




"이반 대장, 아무래도 이거 글러먹은 것 같은데."

"동감이다, 제길."

케인과 이반은 테러리스트들을 견제하며 자신들을 향해 디바이스를 겨누는 국원들과 슬금슬금 빠져나가려는 테러리스트들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말을 주고 받았다. ELF를 사칭하며 테러를 벌이는 무리들을 박살내려고 계획한 작전인데, 오히려 테러리스트들의 도주를 도와주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무장국원들과 테러리스트들을 한바퀴 둘러본 대장은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할 수 없지. 국원은 가급적 상대하지 말고, 테러리스트 놈들만 박살내라. 그렇다고 자기가 격추당하는 놈은 가만 안 둔다."

"매번 그렇지만 이반 대장은 주문이 너무 빡빡해."

"우린 '엘즈리온'만큼 강하지 않다구, 대장."

"엄살부리지 마, 자식들아. 그럼 간다!"

이반의 외침과 함께 ELF 전투반이 돌격했다. 그 선두에는 ELF의 행동대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검은 마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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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드 아머(Powered Armor)
에르트에서 개발된 기동장갑복. 통칭 PA. 장착명령어는 대체로 '암 셋'.
착용자의 완력만으로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기본적으로 관제 AI가 탑재되어 기동성, 유연성 등을 제어하며, 인텔리전트 디바이스의 AI를 분석하여 탑재한 이후로는 보다 부드럽고 빠른 움직임이 가능해져 착용자의 본래 능력 이상의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다.

에르트가 항복한 이후에는 관리국에서 채택, 인텔리전트 디바이스에 PA를 수납하는 구조가 되었다(StS에서 리볼버 너클과 마하 캘리버의 관계). 에르트에서는 동력원을 초박형 연료 전지로 썼으나, 관리국에 채택되면서 착용자의 마력을 동력으로 사용하도록 개량. 또한 마력 증폭기를 탑재하여, 마력이 측정되지 않는 일반인도 E랭크 마도사의 능력을 낼 수 있고 A랭크 마도사의 경우에는 AAA+까지 랭크가 오른 기록이 있다. 다만 그만큼 증폭기의 출력 제어가 힘들다는 점이 문제이기에 B랭크 이하 마도사에게는 PA가 지급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PA 착용시 마도사 랭크 1랭크 UP.

PA는 방어복인 동시에 증폭된 마력을 제어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증폭된 마력을 PA의 전신에 순환시켜 방어력을 올리는 동시에 마력의 폭주를 막는 것.

인텔리전트 디바이스와 같이 자가수복기능이 설정되어 있으며, 기동 및 자가수복에 소모되는 마력의 양은 일반적으로 배리어 재킷의 50% 가량이며, ELF의 PA에는 마력광을 변화시키는 별도 장치가 달려있어 마력 소모량이 조금 더 많다. 또한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고압으로 방출, 그 반동으로 추진하는 방식의 스러스터도 장비되어 있다. 스러스터는 AMF 영향권 내에서도 사용 가능하며(AMF는 마력의 결합을 변경하는 것에만 영향을 준다), 마력 혹은 초박형 연료전지로 가동된다.

관리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질량병기 대응용 마도병기"로 분류되어 대인전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명문 마도사 가문에서는 PA와 그 사용자를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다.


EPA-661 디베즈(Divez)
ELF의 현 주력 파워드 아머. 근접전을 대비한 마력 칼날 생성기가 오른팔등에 내장. 기본 컬러링은 밝은 청색이며, 변화된 마력광 역시 밝은 청색.
'디베즈'는 저승사자를 의미한다.


EPA-666A 엘즈리온(Elzrion)
ELF의 최신형 파워드 아머(아직 프로토타입 단계). 기본적으로 2랭크 UP. 변화된 마력광은 검은색.
양팔등에 마력 칼날 생성기가 내장되어 있으며, 필요에 따라 연사형 중거리 마력포로 활용 가능. 기본 컬러링은 회색이지만 검은 마녀가 착용하면서 컬러링을 검은색으로 변경. 초기형인 EPA-666은 기동 테스트 중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해온 관리국 PA 부대에게 격파되었지만 데이터는 간신히 회수했다. 그 데이터를 참조해 만든 것이 EPA-666A.
'엘즈리온'은 에르트의 창세신화에 등장하는 주신의 아바타 중 하나의 이름으로, 분노한 파괴신일 때의 이름. 현재 EPA-666A는 단 1기만 있기 때문에 ELF에서는 검은 마녀를 엘즈리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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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공개했던 PA 설정에 약간 추가점, 그리고 그간 공개하지 않고 있던 신형 PA가 공개되었습니다. 물론 이번에 공개한 내용이 전부는 아닙니다. 앞으로 전개에 따라 추가 공개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페이트 본편 게임에서 진행에 따라 보구나 서번트 등록 정보가 갱신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럼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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